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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19 [건가람] 학교_전력 60분

학교


흰 머리의 덩치 좋은 청년이 다가오자 가람은 옆에 둔 가방을 치웠다. 며칠 전부터 매 수업시간마다 제 옆 자리에 앉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묻더니 요새는 그냥 말없이 옆에 선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자연스럽게 늘 같이 앉는 관계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사나 대화를 하는 사인건 아니라 수업하기 전까지 어색한 분위기에 가람은 늘 휴대폰만 만진다. 연락 하나 오지 않는 폰으로 이것저것 장난만 치다가 옆 자리의 사람은 뭘 하나 눈동자만 돌려 흘긋 쳐다보았다. 자신과 다르게 키도 크고 몸도 좋은 이 남자는 얼굴마저 조각 같이 잘생겼다. 요새 광고에 자주 나오는 여자 연예인이랑 닮은 듯도 하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여자애처럼 생겼다는 건 아니지만. 저 정도 외모면 따라다니는 계집애들도 많을 텐데 왜 자기처럼 혼자 수업을 듣고 있는 건지. 성격이 엄청 이상할지도 몰라, 가람은 속으로 괜히 흉을 보았다.

12시가 되자 조교가 출석부를 들고 강단에 선다. 이 수업은 수강인원이 200명이나 되는 대형 강의라 출석을 다 부르는 것도 일이다. 그조교는 항상 적당히 눈에 보이는 대로 이름을 부르는 듯하다. 그래서 수업이 시작한지 제법 지났는데도 아직 한 번도 이름이 안 불린 사람들도 있다. 가람 옆의 남자도 그 중 하나다. 가람은 몇 번 출석이 불린지라 그는 가람의 이름을 아는데 자기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왠지 진 기분이다. , 옆의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 없다면 기억도 못하긴 하겠지만.

수업이 시작되고, 강의실엔 알아듣지도 못할 지루한 단어들이 둥둥 떠다닌다. 한국이면 한국어로 수업을 하란 말야. 투덜거려보지만 교수님이 그런 가람의 마음을 알아줄 리는 없다. 심지어 평소보다 발음을 더 먹는 듯 하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고. 짜증만 치솟는다. 칠판의 필기도 흐릿흐릿하고 앞 자리 사람들에 가려서 알아보기도 어렵다. 가람은 어떻게든 필기를 해보겠다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이리저리 빼보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그 때 옆에서 무언가가 쓱 밀려 왔다. 옆 자리의 남자다. 필기 받아적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가람이 불쌍했던 건지 제 필기를 옆으로 밀어주었다. 갑작스런 호의에 가람은 떨떠름하게 감사를 표하고는 펜을 잡았다. 하지만 가람이 예상치 못한 것은 글씨란건 가까이 있다고해서 꼭 알아보기 쉬운 건 아니란 것이었다. 대학생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개발새발 글씨라니. 좋은 뜻으로 보여준 것일 텐데, 미안하지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가람은 적당히 잘 본 척하고 노트를 돌려줘야겠다, 하고 마음먹었지만 정작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대사였다.

하나도 못알아보겠어.”

가람은 제 말에 놀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저래 짜증나는 수업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본 성격이 나왔나 보다. 망했군. 속으로 경솔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상대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의외로 그는 별로 불편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조금 기분 좋은 듯한 미소가 만연하다. 남자는 가람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어째선지 귀에 흘러들어오는 음성이 찌릿하다.

 

그럼 수업이 마치면 직접 읽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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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셔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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